붉은 지붕, 동화 속 성, 그리고 성스러운 언덕의 발트 3국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여름 여행기
여정 기간: 2026년 8월 5일 ~ 8월 12일
동화책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붉은 벽돌 성이 잔잔한 호수 위에 떠 있고, 돌기둥으로 포장된 중세의 골목길,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늪지대, 그리고 오래된 동굴과 성스러운 언덕 등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을 여행할 때 느끼고 볼 수 있는 경이로움은 가득하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이번 8월 발트 투어를 계획한 가장 큰 동기는, 이런 고상하고 멋진 이유보다도 숨 막히는 여름 더위를 단 일주일이라도 피하자는 현실적인 목적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 조지아(GA)주 뷰퍼드(Buford)의 8월 날씨는 90°F(섭씨 약 32~37도)를 웃도는 극심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반면, 이 발트 국가들의 여름 날씨는 그야말로 완벽함 그 자체였다. 낮 최고 기온은 선선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70°F~78°F(섭씨 약 21~25도)였고, 밤 최저 기온은 상쾌한 55°F~60°F(섭씨 약 12~15도)까지 내려갔다. 이번 여행 기간 내내 가벼운 비가 몇 번 내린 것이 전부여서, 야외 투어를 하기에 이보다 더 쾌적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가마솥더위를 피할 수 있는 최고의 피서지였다.
금상첨화로 여태껏 잘 접해보지 못했던 발트 국가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현지인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음식을 맛볼 수 있어서 정말 뜻깊었다. 또한 이번 투어에 미국 전역에서 온 33명의 미국 교포들과 함께 움직이고 식사하며, 그들이 살아가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무척 재미있었다. 여행 내내 우리는 미국 달라스에서 온 인솔자와 현지교포 가이드의 친절한 안내를 받았으며, 깨끗하고 편안한 관광버스를 타고 편리하게 이동했다. 가이드를 통해 우리가 방문한 명소들의 역사적 배경 등을 자세히 설명 듣고, 많지는 않지만 발트 국가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현지 교포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도 접할 수 있었다. 정말 우리 한국인들은 지구상에 살지 않는 곳이 없는 것 같다.
8월6일부터 12일까지 진행된 이번 여정은 북쪽의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의 중세 첨탑에서 시작하여, 남쪽의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의 바로크 골목길까지 이어졌다. 개인적인 추억과 숨은 명소, 그리고 발트해만의 독특한 매력으로 가득 찬 우리의 잊지 못할 여행 기록을 이곳에 남긴다.

탈린 구시가지의 붉은 지붕과 성당 첨탑들의 전경
에스토니아: 중세의 매력과 원시 자연이 만나는 곳
탈린: 항구의 아침과 언덕 위의 첨탑들
우리의 발트 투어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linn)에서 시작되었다. 8월 5일 오후 미국 애틀란타를 출발하여 6일 새벽에 독일 프랭크포트 공항(FRA)에 도착하고 7 시간의 긴 Layover후 비행기를 갈아타고 6일 오후 탈린에 도착했다. 다행이도 American Express카드로 9월 말까지는 FRA에 있는 lounge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 간단한 샤워도 하고 독방에서 잠시 눈을 붙일 수 있어서 많이 피로하진 않았다. 항구와 활기찬 쇼핑센터 바로 옆에 위치한 ‘헤스티아 호텔 에우로파(Hestia Hotel Europa)’에 묵었기에 첫 일정을 소화하기에 최적의 위치였다.
다음날 아침, 항구 거리를 따라 조용히 산책하다가 현지 에스토니아 낚시꾼을 만났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는 낚시터에서 갓 건져 올린 은빛 청어를 자랑스레 보여주며 아이처럼 기뻐했다. 평소 무뚝뚝해 보이는 북유럽 사람들도 이렇게 천진난만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이 지구상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은 인종과 문화가 달라도 근본적으로 모두 비슷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라헤마 국립공원: 늪지대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다
아침 식사후 우리는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1971년에 에스토니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라헤마 국립공원(Lahemaa National Park)’으로 향했다. 이곳은 습지와 소나무 숲, 그리고 고요한 늪(Bog)이 어우러진 야생 생태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수심이 2미터가 넘는 깊고 신비로운 검푸른 늪지 연못 (bog)들을 내려다보며, 이끼 깔린 습지 위로 길게 뻗은 나무 데크 길을 따라 걸었다. 상쾌한 공기 속에서 에코 하이킹을 마친 뒤에는 국립공원 입구의 아늑한 전원풍 호텔 레스토랑에서 따뜻하고 정갈한 점심 식사를 만끽했다.
탈리의 구시가지
다시 탈린으로 돌아온 우리 일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탈린의 전설적인 구시가지(Old Town)를 천천히 걸면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구경했다. 고지대인 톰페아 언덕(Toompea Hill)에 오르자, 붉은 기와지붕과 중세 성벽의 포탑, 그리고 하늘을 찌를 듯한 교회 첨탑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엽서 같은 전망이 펼쳐졌다. 언덕 바로 위에는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의 러시아 정교회 성당인 ‘알렉산더 넵스키 대성당(Alexander Nevsky Cathedral)’이 거대한 세 개의 양파 모양 돔을 뽐내며 웅장하게 서 있었다.
저녁식사전, 잠시 주어진 자유시간 동안에 같이 여행하던 교포 한 분과 우리 부부는 중세 분위기에 흠뻑 취해보고자 구시가지의 유서 깊은 레스토랑인 ‘올데 한사(Restoran Olde Hansa)’를 찾았다. 전통 꿀맥주(Honey Beer)와 스파이시 와인(Spiced Wine), 그리고 간단한 안주를 주문했는데, 온갖 익살스러운 농담과 유쾌한 연기로 우리를 웃겨 준 웨이터 덕분에 잊지 못할 즐거운 저녁 시간이 되었다. 우리들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우리 앞 테이블에 앉아 있던 미국에서 홀로 여행온 Sarah가 양해를 구하고, 우리가 웨이터가 안내해 주는 중세식 음주법을 따라 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촬영할 정도였다. 식당의 다른 외국인 관광객들도 우리를 보며 박장대소하며 함께 즐거워했다.

레스토랑 앞에서
라트비아: 해안의 바람, 신비한 전설, 그리고 화려한 바로크
패르누 해변에서 투라이다 성까지
다음 날 탈린을 떠나 라트비아를 향해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 우리는 에스토니아의 여름 수도라 불리는 패르누 해변(Pärnu Beach)에 잠시 멈췄다. 바닷물은 아주 투명하진 않았지만, 넓은 백사장과 아름다운 해안 공원을 잠시 거닐며 불어오는 발트해의 바닷바람을 맞으니 가슴이 탁 트이듯 상쾌했다.
라트비아 국경을 넘어 시굴다(Sigulda)에 도착한 우리는 투라이다 성(Turaida Castle)을 탐방했다. 가우야(Gauja)강 계곡 위로 우뚝 솟은 이 붉은 벽돌 성은 끝없이 펼쳐진 울창한 초록빛 숲의 파노라마 전경을 선사해 주었다.
구트마니스 동굴에서의 영원한 젊음
투라이다 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구트마니스 동굴(Gutmanis Cave)’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굴 자체는 그리 크거나 깊지 않았지만, 우리는 동굴 안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샘물로 얼굴을 씻었다. 이 물로 씻으면 ‘영원한 젊음’을 얻는다는 현지 전설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재미 삼아 해본 것이지만 밑져야 본전 아닌가?
룬달레 궁전: 발트해의 베르사유
다섯째 날, 우리는 18세기 바로크 양식의 화려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룬달레 궁전(Rundāle Palace)’에 들어섰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을 설계한 이탈리아계 러시아 건축가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Francesco Bartolomeo Rastrelli)가 설계한 이 궁전은 ‘발트해의 베르사유’라는 명성 그대로 화려했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방들을 둘러본 후, 프랑스식 정형 정원과 드넓은 장미 정원을 미니 트롤리를 타고 가이드의 해설과 함께 여유롭게 감상했다.

만개한 프랑스식 장미 정원 너머로 펼쳐진 룬달레 궁전의 바로크풍 외관
123미터 높이에서 바라본 리가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Riga)의 전경을 감상하기 위해 우리는 ‘성 베드로 교회 전망대(St. Peter’s Church Observatory)’ 엘리베이터를 타고 123미터 높이의 첨탑에 올랐다. 이 역사적인 전망대에서는 리가의 아기자기한 붉은 지붕들과 다우가바(Daugava)강, 그리고 그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360도 전경이 펼쳐졌다.

St Peter’s Church
리투아니아: 조각상, 호수, 그리고 바로크의 찬란함
마음을 울리는 길: 십자가의 언덕
여섯째 날, 리투아니아에 들어서며 맞이한 첫 목적지는 샤울랴이(Šiauliai) 근처의 ‘십자가의 언덕(Hill of Crosses)’이었다. 크기와 재료가 제각각인 수만 개의 십자가가 모여 있는 이 성스럽고도 가슴 뭉클한 순례지를 걸었다. 수십 년 동안 이곳은 리투아니아인들의 신앙, 민족적 유산, 그리고 역사적 시련에 대한 평화적 저항을 상징하는 엄숙한 장소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맑게 부딪히며 소리를 내는 나무와 금속 십자가들 사이로 좁은 길을 걷는 것은 마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우리 부부도 작은 십자가 하나를 구매해 가족들의 건강과 소망을 담은 기도 제목을 적어 한 모퉁이에 꽂고 나지막이 기도를 올렸다. 마음까지 맑아지는 상쾌한 아침이었다.

십자가의 언덕앞에서
카우나스 탐방과 드루스키닌카이의 밤
이어서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인 카우나스(Kaunas)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요새인 ‘카우나스 성(Kaunas Castle)’을 관람하고, 15세기 한자 동맹 스타일의 고딕 벽돌 건축물인 ‘페르쿠나스의 집(House of Perkūnas)’을 눈에 담았다. 이후 대표적인 온천 휴양 도시인 드루스키닌카이(Druskininkai)의 호텔에 체크인하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호텔 인근에 조성된 아기자기한 비닐 텐트의 야외 오락장이 눈길을 끌었다.

야외오락장
안타나스 체스눌리스 조각공원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드루스키닌카이 인근에 위치한 ‘안타나스 체스눌리스 조각공원(Antanas Česnulis Sculpture Park)’을 방문했다. 이 야외 미술관은 목공예 명장 체스눌리스가 평범한 나뭇가지를 기발한 민속 예술, 동화 속 캐릭터, 역사적 인물로 재탄생시킨 독창적인 목조각품들로 가득했다. 운 좋게도 명장 체스눌리스를 현장에서 직접 만나 그의 작품들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는 행운도 얻었다. 특히 평범한 나뭇가지에 얇은 금속판(Sheet metal plate)을 정교하게 덧대어 물고기를 삼키는 거대한 나무 뱀을 표현해 낸 그의 번뜩이는 상상력은 감탄을 자아냈다.

평범한 나무가지가 물고기를 잡아먹고있는 뱀으로 변화된 모습
트라카이 성: 물 위의 동화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로 향하기 전, 우리는 갈베(Galvė) 호수 한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섬 위에 세워진 동화 같은 ‘트라카이 성(Trakai Island Castle)’을 방문했다. 잔잔하게 은빛으로 반짝이는 푸른 호숫물 위로 놓인 목조 다리를 건너며, 저 멀리 평화롭게 노니는 돛단배들을 바라보았다. 동행한 다른 여행객들은 돛단배를 타고 트라카이 성에 갔지만, 속이 불편했던 나는 천천히 걸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며 다리를 건너 붉은 벽돌 성에 가서 그들과 합류했다. 버스로 돌아오는 중 갑작스런 소나기에 옷이 조금 젖었으나 곧 멈춰서 우리는 호텔가기전 빌뉴스 구시가지를 구경했다.

갈베 호수의 고요한 물 위에 떠 있는듯한 트라카이 성
빌뉴스
우리는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바로크 양식 구시가지를 자랑하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Vilnius)에서 이번 발트 여행의 마침표를 찍었다. 역사를 머금은 빌뉴스 대학교,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대통령궁, 그리고 가톨릭 순례자들의 안식처인 성스러운 ‘새벽의 문(Gate of Dawn)’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모든 골목과 모퉁이가 마치 살아 숨 쉬는 박물관 같았다.
여행기를 마치며
만약 무더운 여름날의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같은 혼잡한 서유럽 대신 발트 3국으로 눈을 돌려보길 강력히 권한다. 최근 몇 년간 서유럽 주요 관광지들이 에어컨 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폭염과 숨 막히는 습도로 큰 몸살을 앓은 반면, 발트 3국은 선선하고 쾌적한 초가을 같은 기후를 유지해 천국이 따로 없다. 뜨겁게 달아오른 도심에서 땀 흘릴 필요 없이, 싱그러운 바람을 맞으며 맑은 하늘 아래 여유롭게 야외 활동을 하루 종일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여름 피서지다. 탈린의 중세 첨탑에서부터 트라카이의 고요한 호수 정취에 이르기까지, 발트 3국은 인파에 부대끼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늘 접하던 서유럽과는 사뭇 다른 깊고 따뜻한 역사적 감동을 주는 유럽 여행지라 확신한다.